55회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들
말기 암 환자들이 두려워하는 공통적인 어려움은 극심한 통증이다. 통증을 조절하기 위해서 진통제 투여가 필수적이다. 초기의 경미한 통증 단계를 넘어서면 일반적인 진통제로는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투여하는 것이 마약성 진통제이다. 일반적으로 마약은 내성과 습관성을 갖기 때문에 위험하게 생각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말기 환자들에게 통증 조절이라는 순수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할 때는 아무리 많이 사용해도 내성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마약성 진통제는 말기 환자들에게는 매우 좋은 약이다. 그러나 암 환자들의 매우 심한 통증에 매우 효과적인 마약성 진통제에도 부작용이 있다. 그것은 진통제가 모든 것을 진정시키면서, 심지어 장운동까지 쉬게 만드는 까닭에 자연스레 변비가 생긴다. 그래서 변비약을 함께 처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래전에 노숙자인 남자 간암 말기 환자를 돌보았는데, 너무 변비가 심해서 일반적인 관장도 소용이 없었다. 대변을 못 보아서 황달과 간성혼수도 수시로 반복되었다. 이 환자의 소원은 대변을 시원하게 보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한 끝에 마지막 방법으로 손가락으로 변을 파내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간호사와 봉사자가 둘러서서 환자와 씨름을 하였다. 마침내 돌같이 딱딱해진 대변 조각들이 조금씩 빠져나오면서 드디어 장에 가득 차 있던 대변이 그야말로 한 세숫대야 정도가 쏟아져 나왔다. 오래 묵은 지독한 대변 냄새가 온 병동 전체에 진동했지만, 그 지독한 냄새보다는 변비 문제를 해결해 드렸다는 마음으로 모두 박수를 치며 기뻐하였다.
이 환자는 답답했던 몸과 마음이 너무나 시원해졌다고 연거푸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 꼬깃꼬깃 접힌 돈을 봉사자의 손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 물론 극구 사양을 하였지만 막무가내로 건네주었고, 우리는 환자의 이름으로 감사헌금을 드렸다. 그리고 사흘 후, 이 환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천국으로 이사 가셨다. 나중에 유품을 정리해보니 그날 봉사자들에게 건네 준 돈 3만 원(약 20유로)이 그분의 전 재산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속이 시원했으면 자신의 전부를 주었을까 가끔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시원하게 생을 마감하게 도와드린 것이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호스피스 봉사는 마음을 시원케 해주는 봉사이다.
“사단법인 해로”의 상근 직원들도 섬김을 통해 어르신들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며 보람을 느낀다.
그런데 어르신들을 돌보는데 밤낮은 물론 휴일도 따로 없다. 어떤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대부분 거절하지 않고 원하시는 도움을 최대한 해결해 드리려고 노력한다. 병원과 가정으로 환자들을 방문하는 것은 물론, 핸드폰이 안 돼서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많고, 집에 TV 리모컨 작동이 안 되어도 도와 달라고 전화를 하시곤 한다.
어르신들의 입장에서는 무언가 꽉 막혀서 불편하기 때문에 그것을 빨리 해결하기를 원하신다. 적은 인원이 봉사하고 있는 “해로”이지만, 어른들이 일상생활에서도 불편함이 없이 “마음이 시원해지도록” 도움을 드리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적은 인원으로 낮에는 어르신들을 돌보고, 저녁 퇴근 시간 이후부터 밤 늦게까지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일이 많다.
“해로”가 돕는 파독 근로자 어르신들은 힘들고 어려운 분들이 대부분이시다. 경제적인 면에서 노숙인이나 그와 비슷한 정도의 삶을 사시는 분들도 있고, 두세 개의 암이나 각종 질병을 겪으시면서 투병을 계속하시는 분들, 치매로 요양원에서 외롭게 지내시는 분들에 이르기까지 생의 마지막을 맞는 모습이 다양하다.
홀로 살고 계시면서 치매를 앓기 시작하신 경우에, 특별히 교민들과 교류가 없이 지내시는 분들은 그 진행 과정을 알 수 없어 돕기가 매우 어렵다. 독일인 이웃들이 한인 단체를 수소문해서 치매 환자를 도와 달라고 “해로”에 연락을 해오기도 한다. 이런 때에는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달려가 긴급하게 필요한 조치를 취해서 도와드린다.
파독의 시간이 오래되면서 연로하신 어르신들 중에 돌봄이 필요한 분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치매 초기 환자로서 혼자 사시는 분들과 중한 질병으로 도움이 필요하지만, 아직 요양원에 들어갈 형편이 안 되는 분들을 위해서 어르신들이 모여서 생활하며 봉사자들의 도움을 받는 “시니어 그룹 홈”의 필요성을 점점 더 많이 느끼고 있다.
“시니어 그룹 홈”은 먼저 5~6명 정도가 사실 수 있는 집을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몸이 불편하신 환자들이다 보니 방마다 화장실도 있어야 하겠고, 산책도 할 수 있는 주변환경과 작은 텃밭이라도 있는 하우스가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일단 작은 규모의 그룹 홈을 시작해 보면서 우리 실정에 맞는 모델을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아직 누구도 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나라를 위해 애쓰신 어르신들을 잘 섬기고 돌봄으로써, 인생의 마지막에서 막다른 길을 만난 것과 같은 우리 어르신들의 답답한 마음을 시원케 하는 새로운 봉사가 이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그래도 베를린의 어르신들은 “해로”라는 봉사단체가 있어서 크고 작은 도움을 받지만, 다른 도시에 있는 어르신들에게도 똑같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 “해로”는 혼자만 커지려고 하지 않는다. 단체가 커지면 다른 지역으로 도움의 손길을 펼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베를린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발전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점차 확산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본다.
이 일은 돈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봉사하려는 마음을 가진 헌신된 사람이 세워져야 한다. 지역에서 준비된 일꾼들이 헌신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해로”도 지금은 일꾼이 적지만, 앞으로 사람을 키워 지방으로 보내는 때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 “해로” 혼자만 마음이 시원한 단체가 아니라 모두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기관이 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어르신들의 마음이 시원하도록 섬기는 일은 쉽지 않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이기에 오늘도 열심히 봉사를 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관심을 가진 분들의 많은 격려와 기도가 필요하다.
“믿음직한 일꾼은 무더운 때의 시원한 냉수와 같아서,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잠언 25:13)
박희명 선교사 (호스피스 Seelsorger)
1272호 16면, 2022년 6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