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회 인생의 겨울을 준비하는 지혜
예로부터 농경사회였던 우리 조상들은 날씨의 변화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날씨에 따라 씨를 뿌리는 때를 알아야 했고, 추수는 언제 해야 하는지 날씨의 변화가 매우 중요했다. 음력은 날짜가 해마다 변하는 까닭에 태양력을 기준으로 삼아 절기를 정했다. 1년을 24절기로 나누어 계절의 변화를 알게 했고, 농사짓는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했다. 24절기는 3월 21일 춘분을 시작으로, 태양이 1년간 지구를 도는 궤도 360도를 15도씩 나누어 만들었는데, 한 절기는 대략 15일 간격으로 정해서, 해마다 절기를 쉽게 알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한 사계절의 변화는 각각의 입춘, 입하, 입추, 입동과 함께 시작하는 것으로 기준을 삼았다. 11월 8일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立冬)이었다. 입동부터 2월 4일 입춘(立春)까지의 약 3개월을 겨울이라고 여긴다. 11월에 들어서면서 길거리의 나무에서 낙엽들이 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본격적으로 겨울이 왔음을 체감하고 있다. 드디어 기나긴 겨울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유아기, 청소년기, 성인기, 노년기의 사계절이 있다. 이 인생의 모든 계절은 저마다의 의미가 있다. 자연적인 사계절의 변화처럼 인생의 계절도 변화하고, 그때마다 고유의 특징과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나간 인생의 계절을 그리워하며 쓸쓸해 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 오늘(present)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present)이다. 지금 지나고 있는 계절에 맞추어 충실하게 살아야 더욱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인생의 계절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언제일까? 모든 인생의 계절이 다 중요하다. 그러나 인생의 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때는 인생의 겨울인 노년기라고 한다. 겨울은 봄부터 키워온 열매를 맛보며 쉼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계절이다. 또 인내의 시간을 보내며 조용히 새봄을 위해서 기도하며 새로운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 계절이다.
한 알의 씨앗은 겨울을 지나고 나서야 마침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다. 잘 준비된 겨울이 없으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봄을 볼 수 없다. 답답하다고 서둘러 고개를 내밀어서도 안 된다.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도 인생의 겨울을 잘 참고 견디면 하나님께서 새봄에 새 생명을 주실 것이다. 인생의 겨울은 인내와 지혜가 필요한 계절이다.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쓴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인생의 겨울을 맞고 있었다. 계절도 겨울이 다가오는 때였던 것 같다.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로마에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부탁하였다. 마가는 선교여행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이었고, 나중에 다시 마가와 함께 일하자고 했던 동역자 ‘바나바’와는 심하게 다투기까지 하였고, 결국 따로 선교하러 가게 만든 문제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겨울을 맞게 된 바울은 마가를 용서하고 그와 함께 일하기를 원했다. 바울과 같이 우리들도 인생의 겨울에는 인생의 마디마디에 맺힌 것을 풀어내는 부드러운 마음이 필요하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나로 인해서 힘들었던 사람은 없었는지 찾아보고 용서를 구하는 것도 좋겠다. 할 수만 있으면 불편했던 사람들과의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도 인생의 겨울에 해야 할 일이다.
또한 우리가 오랫동안 지니고 살아온 많은 삶의 짐들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정리하지 않으면 소중한 것도 쓰레기처럼 버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다행한 것은 우리 주변에 계신 어르신들께서 인생의 겨울을 잘 준비하고 계신 분들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파독의 힘든 시기를 지나오신 연륜 때문에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것이 몸에 배신 듯하다.
해로에서 섬기고 있는 L 이모님은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이시다. 항암치료도 받으시고 수시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계시지만, 손수 음식도 해서 드실 뿐 아니라, 가까운 분들에게 작은 음식도 만들어 나누어 주기까지 하신다. 힘들지 않으시냐고 물으면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계속 함으로써 스스로 살아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고, 낙심하기 쉬운 삶에 활력소도 되기 때문에 오히려 힘이 난다고 하시며, 할 수 있는 대로 적당한 집안일을 계속해서 찾아서 하려고 하신다.
L 이모님은 당신의 계절이 깊은 겨울임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끼며 간직했던 것들을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하셨다. 건강이 회복되면 입으려고 아껴 두었던 예쁜 옷들과 살림들을 당신보다 더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계신다. 우리도 한국의 옷과 살림을 다 정리하고 독일에 캐리어만 들고 와서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이 많았는데, 여러 이모님들에게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많이 받았다. 삶의 여러 부분을 홀가분하게 정리하는 것도 지혜로운 마음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다.
파독 1세대의 장례 소식이 부쩍 많아졌다. 이제 우리 파독 1세대 어르신들도 인생의 겨울을 지나고 계신 것이다. 이 겨울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나름대로 인생을 돌아보면서 잘 정리하고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생의 겨울은 꼭 노년에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젊은 나이에도 질병이나 사고로 갑작스럽게 인생의 겨울을 맞는 사람도 있다.
새로운 봄을 맞기 위해서는 인생의 겨울을 어떻게 보낼지를 스스로 묻고, 준비하는 것이 지혜임을 기억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베드로전서 1:24,25)
박희명 선교사 (호스피스 Seelsorger)
1338호 16면, 2023년 1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