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회 인생의 흔적인 사진
퇴근 후 부랴부랴 밥을 짓고 한술을 막 뜨려는데 처음 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E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의 주치의라고 밝힌 상대방은 최근 들어 나빠진 할머니 상태를 상의하려고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E 할머니는 치매로 요양원에 계신 분이다. 자녀가 모두 먼 도시에 살고 있어 요양원에는 가까운 사람 연락처로 내 번호를 적어두었고 용건이 생기면 내가 연락을 받아 딸에게 카톡이나 이메일로 전달해 주고 있다. 할머니는 치매 때문에 우울증이 심해지셨는지, 우울증이 심해져 치매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요양원으로 들어가신 이후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 히키코모리로 바뀌셨다.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안 되는 치매 환우라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중요하다. 아니 아프기 때문에 대화를 통한 교감이 보통 사람보다 더 필요하다.
E 할머니에게는 자원봉사자가 정기적인 방문하였으나 코로나의 확산으로 그나마 어려워졌다. 요양원에도 코로나 환자가 발생하고 격리 조치가 몇 달씩 계속되기도 했다. 방문객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할머니를 찾아본 우리는 극심한 경계심을 보이는 할머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커튼을 드리운 어두운 방에 혼자 있고 싶어 하며 배가 안 고픈데도 자꾸 먹으라고 한다며 짜증을 내셨다. 심지어 처방된 약은 자신을 죽이는 약이라고 믿고 계셨다. 파독 간호사로 이전에는 약의 이름과 용도와 분량을 잘 파악하여 하루 세 번 정확히 복용하시던 분이셨다.
할머니는 평소에 잘 드시던 불고기와 김치를 가져가도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딸에게 어머니 상황을 알려주고 의사와 직접 상의를 할 수 있게 연결을 하였다.
E 할머니는 점차 쇠약해졌고 다시 찾아간 나에게 혼자 있고 싶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한국말을 들으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버티고 앉아 이런저런 말을 걸며 방에 있던 앨범을 꺼내어 옛 사진들을 하나씩 빼서 보여드렸다.
“이 사람은 누구예요? 따님이에요?“
“여기는 어디예요? 파리 노트르담 성당 같아 보이는데 맞아요? 가족들과 프랑스 여행을 하셨구나.”
한마디 대꾸도 안 하셨지만, 사진들은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그린 라이트다. 기억하실 것 같은 오래된 사진들을 골라서 계속 말을 걸었다. 사진 중에 시골집 툇마루에 앉아 있는 쪽진 여인의 사진을 보여드릴 때였다.
“이분은 누구세요? 고우시네.”
“우리 엄마.”
침대에 누워계신 E 할머니는 처음으로 소리 내 입을 여셨다. 그리고 손을 뻗어 사진을 잡으셨다. 또 내가 드리는 물을 내치지 않고 받아 스스로 드셨다.
나는 방을 나가서 병동의 간호사에게 할머니가 말씀도 하시고 물도 잘 마시고 계시니 할머니가 드시던 우유와 부드러운 푸딩을 좀 달라고 부탁하였다.
„E 할머니가 말도 하시고 마신다고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바로 드릴게요. 역시 모국어로 얘기를 걸고 간병하니 다르군요. 자기 나라말로 간병하는 게 이렇게 중요하군요!“
그곳의 간호사들은 그동안 염려를 많이 하였는지 자기 일처럼 무척 기뻐하였다. 나는 할머니의 마음을 열어 준 옛 사진이 참 고마웠다.
사진의 단순한 과거의 한 장면이 아니다. 나의 지난 세월과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일대기 작업을 할 때 자주 쓰이는 이유는 사진에 삶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단법인 <해로>는 옛 사진을 모으고 있다. “제 1회 세대 공감 파독 사진 공모전”이다. 파독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을 가진 사람은 누구라도 응모할 수 있다. 사연을 적은 사진을 심사하고 선정된 사진에는 상금과 부상이 마련되어 있다. 또 3장 이상 보낸 분에게는 선착순으로 참가상도 드릴 예정이다. 보내주신 사진은 스캔한 후 원본을 다시 돌려보내 드리려고 한다. 이 행사에 많은 분이 참여하여 한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파독근로 시절에 대한 기록이 영원히 보관될 수 있으면 좋겠다.
<해로 사진 공모전 응모 요령>은 신문의 알림/행사란과 해로 홈페이지를 참고하세요.
링크 http://kyoposhinmun.de/event/2021/05/27/11001/
이정미/ 해로 호스피스 팀장
상담 문의/ 자원봉사 문의/ 후원 문의
이메일: info@heroberli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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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포신문 1220호 16면, 2021년 5월 28일
링크
[특별 연재] 해로 (Kultursensible Altenhilfe HeRo e.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