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회 가족의 무게
어느 날 아침, P 부인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결국…“ P 부인은 호스피스 환우의 가족이다. 남편이 식도암으로 병원을 자주 들락거리는데 남편이 입원하면 P 부인은 남편이 있는 병원으로 자기를 데려다줄 수 있냐는 부탁을 자주 하셨다. 처음 그분이 우리의 차량 지원을 원하셨을 때 힘이 센 동행자여야 한다는 조건을 거셨다고 한다.
어느 날 아침, P 부인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결국…“ P 부인은 호스피스 환우의 가족이다. 남편이 식도암으로 병원을 자주 들락거리는데 남편이 입원하면 P 부인은 남편이 있는 병원으로 자기를 데려다줄 수 있냐는 부탁을 자주 하셨다. 처음 그분이 우리의 차량 지원을 원하셨을 때 힘이 센 동행자여야 한다는 조건을 거셨다고 한다.
독일인 S 여사를 방문해 줄 수 없겠냐는 지인의 청이 들어왔다. 사단법인 <해로>는 한국인을 우선하여 돕지만 그렇다고 국적에 따라 차별을 두지는 않는다. 지인이 준 주소를 따라 찾아간 그분은 가족이 없이 요양원에 혼자 계신 치매 환우였다. 무남독녀로 자라 독신으로 평생을 살았기에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고 젊은 시절에는 독일 연방
호스피스 방문을 가는 Y 부인은 말기 암 환우다. 호스피스 환우로서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같은 교회를 다니며 알고 지내는 그분은 요리, 행사 준비, 기도, 뭐든지 잘하시는 자매셨다. 한마디로 여기저기로 불려 다니는 만능 재주꾼이었는데 몇 년 전에 발병한 암을 이겨내지 못하여 외출을 못하고 집에만 계신 지 꽤 지난
„뚜- 뚜 – “전화 신호가 가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구글 검색으로 찾은 병원의 진료 시간을 다시 확인하고 시계를 보니 진료 시간이 맞는데 전화를 안 받는다. 벌써 3일째 진료 예약을 위해 같은 병원에 전화를 거는 중이다. 결국 전화 예약을 포기하고 인터넷 예약을 하기 위해 병원의
“어어, 저기는 내가 근무하던 병영인데!” 내 옆에서 영국 신사답게 유려하고도 안전한 운전 솜씨를 자랑하던 숀이 갑자기 흥분된 어조를 감추지 못하였다. 우리는 설날을 맞아 80세가 넘은 한인 어르신에게 배달하는 한식 도시락을 배달 가는 길이었다. 코로나가 강타한 이번 겨울은 록다운 조치로 외출의 기회가 원천 봉쇄되어 버린 탓에 집에만 있게
“너는 결혼은 했냐?” 80대 치매 어르신에게 중년의 나는 한없이 어려 보이나 보다. “네에, 저 아줌마예요. 학생이 아니에요.” 뵐 때마다 하시는 똑같은 질문이 벌써 스무 번도 더 반복된 것 같다. 이번에도 역시나 이어지는 레퍼토리는 똑같다. “아기는 생겼냐?” “네, 벌써 아들이 둘이나 있어요.” “어머나, 넌 아들이 있어서 좋겠구나. 난 딸만 셋이 있어.” “이모님, 요즘은
“그치도 요즘 기계를 좀 볼 줄 알우?” 관절염과 골다공증이 심해 온몸이 아프시다는 H 할머니를 방문해 요양 상담을 하고 있는 중에 어르신은 조심스레 다른 이야기를 내게 꺼내신다. “요즘 젊은 아이들만큼은 잘하지 못해요. 그래도 제가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컴퓨터에 앉아 일을 해야 하니 조금은 해요. 무슨 문제가 있으세요? 아는 만큼
방문을 슬며시 연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분명 얼굴은 보이는데,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다시 만지작거리니 목소리가 들리고 그제서야 세상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반가움에 손을 내밀지만 마치 영혼의 것처럼 맞잡을 수는 없다. 그렇게 우리는 작은 화면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해 만난다. 돼지해에 복을 가져올 줄 알았던 2020년은 바이러스의 무덤
1440년, 독일 마인츠에 사는 금 세공업자 구텐베르크는 인쇄기의 발명으로 지식혁명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이룩한 인쇄술은 새로운 시대정신의 첫발이었다. 이는 이후 일어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세상은 한 번쯤 충격적 사건과 함께 문화 패러다움의 변화를 경험한다. 20세기 이후의 키워드는 단연 멀티미디어다. 종이문화의 근간이 된
그는 이승만 정권 시절, 청와대에서 고위간부를 지낸 분이다. 그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지나왔던 인생의 그늘로 가득했다. 하지만 풍채를 지탱했을 골격은 품위 있고 곧바랐다. 시대의 영욕에도 버텨왔을 끈기와 자신감이 풍겨났다. 비록 호스피스 병동에서 남아 있는 시간을 세고 있었지만 호령을 누렸을 위엄은 살아 있었다. 그래도 어쩌랴. 그는